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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병 속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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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센터관리자 2020-04-27 21:39

병 속의 편지

 

      이영주

 

 

 

 

   어둠이 검은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한 이후부터 시간의 꿈을 담고 싶어졌습니다. 병에 담으면 될까요?

   긴 시간을 건너왔으니 따뜻했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병을 모으고

   병을 세우고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은 찰랑찰랑한 어둠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의 입구를 꽉 움켜쥔 채 잠이 들고

 

   나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관한 것들을 자꾸만 쓸어 담고

 

   너니까, 너라서, 너 때문에 지옥에 있었지. 우리의 싸움이 검고 어두워질 때 너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시간은 꿈이 되었지. 

   전도서를 펼치면 허무,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지웠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종말보다 잔혹해서 병에 담고 싶어지는데

 

   그는 매일 밤 펜을 버리고

   문장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아무것도 쓰지 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지 마. 이제는 쓰지 마.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

   사라질 수가 없지.

 

   그는 연애편지를 이렇게 건네네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그저 손이라는 물질을 잡고

 

   병의 입구를 열고

 

 

 

                       —《현대시학》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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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1974년 서울 출생. 2004년《문학동네》로 등단. 시집『108번째 사내』『언니에게』『차가운 사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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